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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의 현황 (퍼옴)
운영자  2006-04-12 15:38:10, 조회 : 3,188, 추천 : 231

재일동포사회는, 이미 재일 100년의 역사를 맞으려 하고 있다. 전쟁 전후 를 통해 그 대부분은 고통 속의 생활을 강요당해 온 시대였다. 1970년대 부 터의 재일동포 생활권의 확립과 인간의 존엄에 대한 싸움은, 재일동포를 비롯하여 그때까지 외국인에 대해 폐쇄적인 일본사회에 있어서, 외국인의 인권 문제가 이미 피해 갈 수 없는 사회적인 과제가 되었다. 그동안 느리긴 하지만, 법적 제도적 및 사회적 차별이 해소되고 재일동포 생활의 안정에도 큰 영향을 미쳐왔다. 그 연장선상에 ‘다민족 다문화 공생사회’라는 21세기에 대한 비전이 명확해져 왔다.
또한 전후의 재일사회를 강하게 규정해 온 본국의 남북 분단의 정황이 크 게 변하고, 통일의 전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도 재일동포 사회에 밝은 미래를 제시하게 되었고, 낡은 틀에서 나와 새로운 틀이 요구되어지게 되었다.
한편, 재일동포사회는 오늘날 다양화에 직면해 있다. 먼저는 재일동포사회 구성원의 다양화와 아이덴티티의 다양화다. 재일동포사회의 세대교체가 진행 되어, 1세는 매우 적어지고 일본태생의 세대로 중심이 옮겨졌으며 이미 5세 도 태어나고 있다. 국제 결혼에 의한 다국적 가족, 일본국적 취득자, 또 80 년대 이후에 도일한 신 1세 및 2세도 증가하고 있다. 다음은 여러 세대, 지역성과 생활 환경, 민족교육의 유무, 모국어의 사용, 민족이름 사용의 유무 등을 배경으로 한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다양화다. 이것들의 다양화는 재일 동포의 라이프 스타일에도 관계하고 있다.
21세기에 있어서 재일동포 사회가 목표로 하는 비전은 ‘다민족 다문화 공 생 사회’의 실현이다. 일본 사회가 외국인과 일본인의 ‘공생’을 달성하고, 새 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가치관이 필요하다. 외국인의 인권 과 민족적 문화적인 독자성, 그리고 지역사회 주민으로서의 지위와 권리를 포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불가결하다. 동시에 재일동포 사회에서도 그에 맞 는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 즉 책임을 지고 스스로가 사는 지역사회에 참여 하고 그 발전에 함께 힘쓰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

Ⅰ 재일동포의 역사
현재 한국 국적 또는 조선 국적의 ‘재일한국/조선인’은 약63만명(2002년 현재) 이다. 이 중 많은 수가, 일본이 패전 이전에 식민지 지배하의 조선에서 일본에 건너온 1세와 그 자녀, 손자들로, 그 수는 약 50만명에 이른다. 나 머지 13만명은, 제2차세계대전 후의 한반도의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정치적, 경제적 혼란 속에서 일본에 ‘난민’처럼 도항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과, 1965년의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에 취업 취학 결혼 등을 목적으로 일본에 도항해 자리잡은 사람들과 그 자녀들이다. 이외에, 귀화하여 일본국 적을 취득한 사람과 그 자손 및 부모 중 한 쪽이 일본국적자로 태어나 일본 국적 또는 이중 국적이 되어있는 ‘일본국적 한국/조선인’이 약 34만명으로 추산된다. 재일한국/조선인이나 일본국적 한국/조선인이나, 그 대부분이 일본 의 식민지 지배에 기인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전후의 일본은 그들에 대해 철저한 ‘억압 동화’정책을 계속해 왔다.

Ⅰ-1 조선멸시와 동화주의
豊臣秀吉에 의한 조선침략(1592~1597) 후, 일본과 조선의 외교 관계는 빠 르게 복원되었다. 일찍이 조선은 일본과 국교를 한 유일한 ‘통신국’이고, 쇄 국정책 하에서도 일관하여 우호관계에 있었다. 그후 메이지유신을 거쳐 입구 탈아(入欧脱亜)노선 하에 아시아의 맹주라 할만한 길을 일본이 나아감과 동 시에 정치적으로는 征韓論, 사상적으로는 福沢諭吉의 ‘脫亞論’ 등으로 대표되 는 것처럼, ‘조선은 예부터 일본의 속국이며, 일본이 우월하다’는 인식이 태어 났다. ‘일본우월/조선열위’의 이데올로기는, 일본의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지탱 한 사상/역사관에 유래한다.
1876년에는 일본은 무력으로 조선에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도 록 하고, 1905년 을사조약에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10년의 한국 합병 을 거쳐 조선을 완전히 식민지로 했으나, 그것은 침략이 아닌 양국의 동의에 바탕한 ‘병합’이라고 강?杉? 그러나, 19세기말부터 조선에서의 반일 의병 투쟁, 1894년 동학혁명(갑오농민전쟁), 1919년 삼일독립운동을 거쳐 조선민 중의 반일/민족독립운동에 의해 일본의 조선 지배는 당초부터 부드럽게 진행 되지 않고, 그때까지의 ‘무단통치’에 의한 식민지지배 방침은 ‘문화통치’로 변화, 일정한 전환을 이루었다. 삼일독립운동 직후, 천황은 칙서에서 조선민 중에 대해서도 ‘일시동인(一視同仁)’ 정책을 펼 것을 주장하고, 長谷川 조선 총독은, ‘동화정책’의 정식화를 행했다. 동화주의는, 근대 일본에 동화하지 않 는 조선=후진/야만/열등=이라는 조선멸시관(헛소문, 선동적인 악선전)에 근거 한 정책적 총노선이었다. 그 위에 성립한 식민지정책이 조선어의 금지, 정책 으로서의 창씨개명(1939~45) 등으로 대표되는 민족말살정책이라 불리는 것 이다.

Ⅰ―2전전(戰前)
1910년대, 조선에서는 통치자인 일본의 군대나 경찰권력을 배경으로 토지 조사사업/임야조사사업을 행하고, 광대한 토지/논밭/산림이 일본의 국유 내지 는 지주나 자본가의 소유가 되어, 조선에서 중국/러시아/일본으로의 노동력 유출은 사회구조적인 것이 되었다. 제1차세계대전에서 막대한 이윤을 얻은 일본독점자본은 조선의 값싼 노동력을 매우 효율적으로 일본 국내에 배치 했다. 이것이 재일한국/조선인 형성의 근본이유이다.
재일 조선인의 주된 직업은 토목/건설공사 등의 일일고용인부, 공장의 비숙 련공, 잡역부, 탄광부 등이고, 항상 일본인 노동자의 산업 예비군적 위치로서 실업률이 높았다. 또한, 동일노동에 대한 40~50% 낮은 차별임금이 상식화 된 한편, 위험하고 어려운 노동현장에 보내어져 ‘タコ部屋(타꼬베야= 홋카이 도에 있었던 광산 노동자나 공사 인부의 합숙소를 일컬음. 노임을 착취하고 폭력과 감금을 일삼았으므로 사회문제가 되었음)’적 노무관리와 학대/학살의 박해를 받았다. 임금 불지급/배급지연에 대한 항의, 대우개선요구를 내세운 노동쟁의에 대한 보복으로 생명까지 빼앗긴 조선인 노동자는 부지기수다.
1923년의 관동대지진은 조선인 학살사건 중 최대규모였다. 내무관료가 계 획한 ‘빨갱이와 조선인습격’의 선동적 거짓 선전에 말려든 군대/경찰, 민간의 ‘자경단’은, 수많은 사회주의자와 6,000여명의 조선인을 죽였다.
전쟁전의 재일조선인에게 있어 주거의 확보는, 민족차별과 차별 임금/실업 에 의한 생활압박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도쿄, 오사카, 나고야, 교토, 고베 등 대도시에서는 하천가나 공사현장에, 그리고 홋카이도, 큐슈 등에서는 탄광지역에 ‘조선인부락’이 형성되고, 동시에 도시부락이나 슬럼지구에 유입/ 혼합거주도 시작되었다. 이러한 생활상태, 노동실태가 사회문제가 되고, 20 년대부터 재일조선인에 대한 본격적인 융화 정책이 지방레벨에서 전개되 었다. 그것들은 ‘내선융화(內鮮融和)정책’이라 불리는데, ‘內’는 內地, ‘鮮’은 모멸적인 의미를 지닌 조선이라는 의미다. 38년, 내무성의 외곽 어용단체로 서 중앙협화회가 결성되어 ‘황국신민화’를 위한 ‘협화사업’이 국책으로서 전개되었다. 재일조선인은 협화회가 주최하는 국어강습회, 신사참배, 군사훈 련 등에 동원되어, 일본어와 일본이름 사용, 일본옷 착용, ‘황국신민의 서사 (誓詞)’ 창화 등 철저한 일본인화를 강요당하며,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서 엄격한 관리통제하에 놓여졌다. 이러한 정책의 배경에는 1910년대 말기부터 일어난 재일조선인 자신의 민족운동, 노동운동, 사회주의운동의 존재가 있다. 전전, 민족독립과 인권옹호를 호소하는 조선인을, 일본 국가와 사회는 ‘비국 민/ 부령선인 (不逞鮮人)으로서 철저하게 배제/배격했던 것이다.

Ⅰ―3 전후(戰後)
1945년8월15일, 일본의 패전에 의해, 조선은 식민지지배에서 해방되었 다. 10월 재일본조선인연맹(朝連)이 결성되고, 재일조선인의 생활권 옹호, 귀 국준비체제의 정비 등의 투쟁을 전개했다. 또 46년10월에는 재일본 조선거 류민단(民團)이 결성되었다(1948년에 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개칭). GHQ(미 국의 일본점령군사령부)는 재일조선인을 재일대만인과 함께 해방인민 (Liberated Peop1es)이라면서, 필요한 경우에는 적국인(Enemy Nationals) 으로서 처우하기로 결정하고 일본인이나 비일본인, 어느 쪽으로 판단하는가 는 정치적 정세에 의해 좌우되며, 법적지위는 매우 애매했다. 전후, ‘야미시장 (ヤミ市)’ 경제유통시에 ‘제3국인’이라는 차별어가 생긴 것은 이런 이유이다.
일본정부 및 GHQ.는, 조선련맹에 대해 철저한 적시정책을 취하여, 귀국의 편의를 주지않고 특히 그 민족교육에 대해 탄압을 계속했다. 46년3월경까 지는, 공식/비공식으로 130만명 이상이 조선으로 귀국했지만, 재류하는 재일 조선인에게는 47년5월2일 공포된 외국인등록령(구헌법 하에서의 최후의 칙령 207호)을 적용했다. 한편, ‘일본뮌岵?가지고 있으며, 일본에 재류하는 이상은 법에 따라야 한다’는 등의 이론으로 패전 직후부터 진행되었던 독자 적인 민족교육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고, 수많은 自主학교는 패쇄를 당했다. 49년 9월, ‘단체등 규제령’에 의해 조선련맹은 해산에 몰리게 되었다. 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 이 전쟁에 의해 고국으로의 귀환을 희망했던 재일한국/조선인은 귀국의 길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전쟁의 종결은 남북조선의 분단을 고정화하는 동시에, 재일한국/조선인에게는 ‘본국’과 ‘재일’과의 분단을 가져왔고, 더욱이 조국분단의 이데올로기 대립이 그대로 재일한국/조선인 사회에도 흘러들었다.
59년부터 시작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으로의 ‘귀국사업’(1984년까지 9만3천명 이상이 귀국)과 65년에 체결된 한일 기본조약을 둘러싸고 재일 사회는 더욱 분단되어갔다. 그 속에서 ‘전후일본’은, 남북조선 분단의 수익 자였을 뿐만 아니라, 재일한국/조선인 사회의 분단을 이용하여 정책을 恣意 적으로 추진해 왔다.


Ⅱ 전후의 법적지위
식민지배하의 조선인은 강제적으로 일본국적이 되었지만, 일본정부는 1952 년, 대일강화조약이 발효한 날을 가지고, 재일한국/조선인에게서 일본국적을 박탈했다. 게다가 일본국민과 동등한 보호를 부여하는 것을 거부, 지문압날 제도를 포함한 외국등록법과 출입국관리령(현재의 출입국관리및난민인정 법)을 적용하는 한편으로, 사회보장제도의 적용에서도 제외시켰다. ‘인간의 최저한의 생존을 확보하는’ 생활보호법에 있어서도, 일본 국민에게 준해서 ‘당분간’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고, 불복진술권을 지금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 52년 4월 30일에 시행된 전상병자 전몰자유족등 원호법은, 4월1일로 소급해서 적용되기 때문에 대일강화조약이 발효한 4월28일까지 일본 국적 을 가지고 있었던 재일한국/조선인들은 적용대상이 된다. 때문에 부칙 2항 에서 ‘호적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당분간 이 법률을 적용 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일찍이 일본인으로서 전장에 나간 한국/조선인을 적용에서 제외시켰다.
1979년, 일본은 국제인권규약을 비준했지만, 정부는 공영주택의 문호개방 이외, 상기와 같은 차별적 법제도의 개정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81년 난민 조약 비준과 함께 정부는 겨우 국민연금법, 아동수당법 등을 개정했다. 그 후, 85년 여성차별 철폐조약의 비준과 함께 국적법이 부계 혈통주의에서 부모 양계 혈통주의로 개정되었을 뿐, 94년의 아동권리조약 비준, 96년 인종 차별 철폐 조약 비준 시에도 정부는 국내법을 일체 바로잡지 않았다.
1991년 ‘한일각서’에 의해 입관특례법이 시행되었지만, 그 속의 ‘특별영주’ 제도는 일본태생 2세/3세/4세가 되어도 정치적인 이유로 퇴거강제 가능 하며, 또한 일본에의 재입국도 거부할 수 있게 되어있어, 일본에 영주하는 것을 ‘권리’로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또 87년, 92년, 99년의 3번에 걸쳐 외국인등록법이 개정되었지만, 재일 한국/조선인 등 외국인의 일상생활을 빠짐없이 감시하려는 법 목적과 그 기능은 그대로다. 1980년대부터 팽배하게 일어난 지문압날거부 싸움은, 이러 한 ‘억압/동화’ 정책에 대한 양심적 불복종 행동이며, 상징적인 ‘이의제기’ 였다.


Ⅲ 차별의 현상
법률과 제도의 규정은 없지만 민족이 다르다는 것을 이유로, 사회생활 속 에서 재일한국/조선인이 받은 민족차별이 있다. 민간기업에 채용되지 않는 취직차별, 주택입주를 거부당하는 입주차별, 은행에서 융자에의한 분할 지불 에 제한을 받는다거나 크레디트카드의 가입을 제한받거나 특별한 보증인을 요구받는 금융차별, 민간의 장학금 모집에서 제외되는 차별, 또 결혼 차별 등 여러 가지 사회적 차별이 있으며, 민족적 뿌리를 갖는 것을 대등 하게 인정받지 못하는 의미에서의 민족차별도 들 수 있다. 이것은 일본의 교육 제도 속에서, 재일한국/조선인의 민족적 마이너리티성에 입각한 교육이 공식 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문제와, 본명(민족명)을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는 것 등이 있다. 1983년에 가나가와현이 한 ‘가나가와현 주재 외국인 실태조사’에 의하면, ‘방이나 주택 임대시 차별을 받은 경험’의 유무에 대해서, 회답한 재일한국/조선인 866명 중에 ‘본인이 경험 했다’고 대답한 사람이 177명(20.4%), ‘주변에있다’고 대답한 사람이 176명(20.3%), ‘결혼에 관한 차별을 받은 경험’에 대해서는, ‘본인이 경험했다’고 대답한 사람이 121명(14.0%), ‘주변에있다’고 대답한 사람이 229명(26.4%), 그리고 ‘취직차별을 받은 경험’에 대해서는, 회답한 766명 중 ‘있다’고 대답한 사람 이 296명(38.6%)이라는 결과가 보고되어 있다.


Ⅲ―1취직차별
재일한국/조선인의 취직차별 문제가 英맛岵막?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70 년에 일어난 히다찌제작소 취직차별사건부터다. 당시 아이치현에 살았던 재 일한국인 2세청년 박종석은 동년 8월23일, 히다찌제작소공장의 채용시험 을 나고야에서 치르고, 9월2일자 정식채용통지서를 받았다. 박종석은 수험 시 민족차별을 염려해서 성명란에 통칭명(일본명), 본적지란에 출생지를 기 재했다. 그 후, 제출해야 하는 호적초본을 외국인이기 때문에 제출할 수 없 다고 하자 회사는 ‘당사는 외국인은 고용하지 않는다’고 하여 해고을 선언 했다. 박종석은 회사의 대응에 대해서 부당한 민족차별, 취직차별이며, 해고 처분은 무효라고 그해 12월8일 요코하마지방재판소에 제소했다. 이 재판 과 병행하여 박종석을 지원하는 재일한국․조선인과 일본인이 ‘박군을 위한 모임’을 결성하여 히다찌제작소과 직접교섭을 하면서 운동의 범위를 넓혀 갔다. 74년 6월19일 요코하마지방재판소는 박종석의 주장을 인정, 히다찌 제작소의 해고는 민족차별에 의한 것으로서 무효라고 하였다. 이 재판과 그것을 지원하는 민족차별 규탄투쟁은, 그 후의 재일한국/조선인의 민족차별 철폐운동의 출발점의 하나가 된 것이다. 그 후, 민족단체와 시민그룹에 의한 민족차별 철폐운동과 일본사회 속의 반차별/인권보장을 요구하는 여러 운동 의 발전 속에서 민간기업에서의 하나하나의 취직차별 실태가 밝혀지게 되고, 재일한국/조선인의 문호가 서서히 넓혀져 갔다. 그러나, 지방에서 취직차별은 끊이지 않고, 차별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95년의 국세조사에 의하면, 일본인의 완전실업률이 4.3%인데 비해, 재일 한국/조선인의 완전실업률은 8.5%로 되어있다. 또 재일한국/조선인의 유직자 직업은 ‘기능공/채굴/제조/건설작업자 및 노무작업자’가 가장 많은 31%, 다음 으로 ‘판매종사자’ 18%, ‘서비스직업종사자’ 16%로 되어있다. 이것은, 재일 한국/조선인에 있어서 직업선택의 자유가 극도로 좁아져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렇나 민간기업에 있어서의 차별적인 실태는 ‘공적기관에서의 취직 차별/임용차별’도 조장되고 있다. 97년에 시민단체가 한 조사에서는 전국의 도도부현시구(都道府県市区) 731지방공공단체 중 국적조항을 세워 채용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은 공공단체가 20%, 현업직 등은 인정하지만 채용화가 제일 많은 일반사무직을 개방하지 않는 공공단체도 56%를 웃돈다. 외국인 직원수는 확인할 수 있는 것이 772명이고 전 직원수의 겨우 0.05%에 지나 지 않는데, 이 비율은 일본의 총인구에서 점하는 외국인 구성비 1.23%(99 년)와 비교해도 매우 적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재일한국/조선인과 재일외국인의 취로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개개의 기업이 일으킨 채용거부라는 사례뿐 아니라 외국인의 취로구조와 노동실태 자체에 대한 상세한 실태조사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밀입국자’의 취로, 노동 조건 실태의 해명 등과 함께 금후의 과제로 되어 있다.


Ⅲ―2 주택입주차별
입주차별은 전전의 오사카시내에서의 사례가 기록으로 남아있지만, 전후가 되어도 끊이지 않아, 78년 5월에는 오사카시내에서 다발하는 입주차별에 대 해 시민단체의 문제제기에 응하는 형태로 오사카부건축진흥과는 주택업자 4사에 대해 예고없는 실태조사를 하여, 업자가 표시해 두었던 ‘외국인불가’ 간판 등을 철거시켰다. 또 같은해 8월1일에는 오사카부 지사이름으로 ‘택지 건물취급업의 적정한 운영에 대하여’라는 요망서를 재일한국/조선인 다거주 지역의 주택업자에게 보내고 있다(더구나, 공영주택의 입주차별은 1979년 5월에 국제인권규약이 국내발효하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입주차별은 없어지지 않고, 91년부터 92년에 걸쳐 오사 카부, 오사카부 택지건설취급업협회, 전일본 부동산협회 오사카부본부의 3자 에게 행해진 ‘택지건물취급업자에 관한 인권문제 실태조사’에서는 7713의 부동산업자 중 임대주택입주시 집주인으로부터 재일외국인 입주거부 요청이 '있다'고 답한 것이 전체의 27.4%, '없다'가 46%, 임대의 '매개업무는 하지 않고 있다'가 24.3%, 불분명이 2.4%였다. 이중, '매개업무는 하지않고 있다’ 는 업자를 제외한 수를 전체로 하면, 입주거부 요청이 '있다'가 36.1%, '없다' 가 60.7%로, 약 4할의 업자가 집주인의 입주거부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 된 다. 또 89년 1월, 오사카시내에 사는 재일한국인 배건일이, 중개 업자에게 대금을 지불했던 맨션의 입주를 거절당했다. 배씨는 같은 해 4월, '재일한국 인이라는 것을 이유로 입주거부하는 것은 불법행위'라 하고, 집주인과 감독 권한, 의무를 갖는 오사카부를 피고로로 하여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제소했다. 93년6월18일 위 재판소는 집주인이 재일한국인이라는 것을 이유로 입주 거부를 한 것을 인정하고, 거부에 합리적 이유는 없으며, 민법상의 신뢰칙에 반한다?하여, 집주인에 대해 손해배상과 이익상당분의 지불을 명하였다. 이 판결은 입주차별에 대한 첫 사법판단이며 재일 한국/조선인에 대한 입주 거부가 민족차별이라는 것을 인정한 판결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판결에 의해 주택입주차별의 존재가 새롭게 분명히 드러 나게 되었다.


Ⅳ 일본사회의 과제
재일한국/조선인 사회에서는, 이미 2세/3세가 과반수를 점하며 이제 4세 와 5세가 태어나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국적법에서 혈통주의를 채용 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재일 2/3/4세라도, '일본국적을 가지 고 있지 않은 자'로 취급되며, 기본적으로 향유해야 마땅한 기본적 권리를 지금도 제한 당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1) 지방자치단체의 참정권 : 법률에 의한 불인정(직접 주민투표권도 자치 단체 조례에 의해 불인정)
2) 인권옹호위원/교육위원/민생위원의 취임권 : 법률에 의한 불인정
3) 지방공무원/공립학교교사의 취임권 : 정부견해에 의한 제한. 공립 소학 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교사채용에 있어서, 정교사가 아니라 상근강사 로서 임용하고 커리큘럼 등 학교기본방침의 기획, 입안과 입퇴학, 졸업 인정의 전제가 되는 평가 등의 직무종사를 금하며, 관리직에 대한 등용 의 길도 닫혀있다.
4) 일본에 대한 재입국권 : 법률에 의한 불인정(1980년대, 외국인등록법 상의 지문 압날을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재입국 불허가된 건수는 107 건에 달한다)
5) 프라이버시권, 품위를 손상하는 취급을 받지 않을 권리, 일본 국내에서 이동의 자유 : 법률에 의한 불인. 외국인등록법에서는, 지문압날제도가 폐지되기는 했지만, 등록증의 상시휴대 및 7년(특별영주자, 영주자 이외 의 외국인은 5년)마다의 갱신과 가혹한 형사벌제도 등을 정하고 있다.
6) 사회보장의 수급권 : 경과조치가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약 5만명의 재일고령자와 약 3000명의 재일 장애자가 국민연금제도에서 제외되어 있다. 생활보호는 일본국민에 준하여 적용되지만, 권리로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7) 전후보상의 수급권 : 법률에 의한 불인정(전쟁희생자 원호에 관련된 15법 중, 원폭피폭자 관련법 외의 13법이 국적요건을 정한다).
8) 마이너리티=민족적 소수자로서의 권리 : 정부는 재일한국/조선인을, 자유권 규약이 27조로 정해지는 마이너리티로서 인정하지 않고, '민족 교육을 받을 권리와 민족명을 가질 권리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인정 하지 않는다(예컨대, 오사카의 1996년 조사에서는 일본학교에 다니는 한국/조선인 아동, 생도의 본명사용률은 더욱 적으리라 생각된다). 정부 는 이와같이, 일본국적 한국/조선인에 대해서도 마이너리티로서의 지위 와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귀화신청 시, 민족명을 방기하여 일본식 이름을 갖도록하는 행정지도가, 1980년대 중반까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9) 사회적 차별로부터 보호/구제를 받을 권리 : 취직, 결혼, 입주등에 의한 사회적 차별을 적극적으로 시정하고 '결과로서의 실질적인 평등'을 도모 하는 조치가 무엇 하나 취해지지 않는다. 또1989년, 94년, 98년에 조선 학교에 치마저고리를 입고 통학하는 학생들에 대한 폭행사건이 빈발 했지만, 정부는 적극적인 방지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재일한국/조선인이 당연히 향유해야 할 기본적 권리의 이러한 제한과 불인정은, 일본이 이미 가입해 있는 국제인권규약(자유권규약, 사회권 규약)과 어린이의 권리조약, 인종차별철폐조약 등 국제인권법에 명백히 위반한다. 일본정부 제4회보고서를 심의한 국련의 규약인권위원회는 98 년 11월 5일, 최종견해에서 '국내법제를 규약에 환전히 합치시키기 위해 법률을 다시보고, 적절한 개정을 행할 것을 권고한다'고 명기했다.
70년대부터의 민족차별철폐투쟁의 집대성으로서, 민족차별과 싸우는 연락 협의회는 88년, '재일 구식민지 출신자에 관한 전후보상 및 인권보장법 (초 안)'을 제안. 또 지문거부, 외국인등록법 개정 운동에서부터, 외국인등록법 문 제와 함께하는 전국 그리스도교 연락협의회가 98년, '외국인주민기본법(안)' 을 제기했다.
다국적화, 다민족화가 급속히 진행되고있는 오늘날, '재일'의 역사와 현재를 직시한 발본적인 법개정과 '지역사회를 구성하는 외국적주민'으로서의 국제 인권법 에 기초한 포괄적인 법제도의 확립이 요구되고 있다.


Ⅴ 형성과 아이덴티티
현재 약 63만명이 있는 재일한국/조선인의 뿌리를 더듬으면, 일본에 의한 식민지지배(1910.8~45.8)의 산물이다. 조선은 1910년8월22일에 일본에 합병되어 그 식민지가 되었다. 1909년의 재일조선인 인구 790명은 대부분 이 유학생으로, 졸업과 동시에 귀국하는 지나는 성격이었다. 식민지 노동력 으로서 조선인이 본격적으로 일본노동시장에 유입된 것은 제1차세계대전 (1914~18)의 시기이다. 전시경기에 의해 노동력이 부족하고 조선에서 왕성 하게 모집되었다. 도일자와의 연고와 모집에 의해 재일조선인 인구는 급증 하여 30년에는 약 30만명, 38년에는 약 80만명에 달했다. 이 시기 일본으 로의 도항자는 주로 농촌에서 지주, 소작제도에 의한 농민의 빈곤이 원인이 었다. 39년 이후의 인구 급증이 눈에 띈다. 중일전쟁의 곤경과 전선의 확대 에 의한 병력동원을 위해 일본 국내의 전시산업 노동력 부족이 심각해지고, 강제 연행이 개시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태평양지역으로의 전선의 확대가 그에 박차를 가했다. 재일조선인 인구는 44년에 약 200만명, 45년 5월에는 210만명(추정)에 달했다. 여기에는 국인, 군속 36만명은 포함되지 않았다.


Ⅴ―1전후의 귀국과 잔류
일본의 패전에 의해 조선은 해방되었다. 전후의 혼란 속에서 정확한 수는 파악되지 않지만, 문자 그대로 우르르 귀국했다. GHQ의 지령에 의해, 계획 수송을 위해 46년 3월18일 후생성이 실시한 등록에 의하면, 등록 총수 64 만6943명 중, 51만4035명이 귀국희망자로 되어있다. 45년 5월 시점에서 의 추정되는 수가 210만명이었지만, 전후 6개월 동안에 140만명이상이 귀국한 것으로 되어있다. 재일한국/조선인의 98% 남짓이 남한 출신이다. 해방후의 남북분단에 의한 정치, 경제적 혼란(남쪽에서는 미국군정), 그에 이은 한국 전쟁(1950~53) 때문에 귀국의 발이 멈추어졌을 뿐 아니라, 일부 귀국자가 일본에 역류해오는 현상이 일어났다. 경찰당국이 말하는 '밀항'이 그것이다. 한국전쟁 중인 52년 4월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하기 직전, 법무부 민사국장의 일방적인 통보에 의해 재일한국/조선인은 일본 국적을 박탈당하고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외국인이 되었다. 이 '국적조항'을 이용한 한국 /조선인차별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전후 한국으로의 귀국자 외에 59년 12월부터 시작된 북한에 대한 귀국사업에서, 84년까지 9만 3000여명이 귀국, 또한 '귀화'에 의한 일본국적자가 20만명 이상으로 추정 되고 있다.


Ⅴ―2재일의 현재
전후 50여년이 지나고, 재일한국/조선인의 내용도 크게 변화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가, '조선태생'에서 '일본태생'으로의 세대교체다. 전후 초기는 '조선태생'의 제1세가 중심이었지만, 점차 '일본태생'의 세대로 옮겨져 지금 은 95% 전후로 추정된다. 즉 '일본태생'의 세대는, 국적상은 외국인이지만, 본국에 생활기반이 없고 본국에 대한 귀속의식도 옅다. 이미 그들은 법적 으로도 '영주권'을 가지며, '재일' 자체를 아이덴티티로 하는 정주외국인이다.
50년에는 재일외국인의 90% 이상이 한국/조선인이며, 버블경기가 시작되 기 전 85년에조차 그 비율을 80% 이상이었다. 결국 현상적으로는 재일외국 인 이콜 한국/조선인이라고 해도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80년 후반의 버블 경기와 함께 3K(키타나이, 키쯔이, 키켄 ; 더럽고, 고되고, 위험한) 노동 분야 및 농촌과 영세기업의 청년 결혼난 때문에 '아시아의 신부'가 급증했다. 특히 중국인, 일본계 브라질인, 필리핀인의 급증현상이 눈에 띤다. 말 그대로 '외국인노동자 문제'의 부상이다.
재일한국/조선인의 경우는, 인구가 약 64만 전후의 상태였지만, 91년 69 만3050명을 정점으로 감소경향에 있고, 재일외국인 총수의 급증에 동반 하여 98년에는 반수 이하인 42.2%로 감소했다. 이러한 경향은 금후 더욱 짙어지리라 생각된다. 이것은 전전에 도항해온 제1세 및 그 자손인 '구식민 지 출신자'의 경우, 매년 '귀화'에 의한 일본국적자수가 자연증가수를 상회했 을 뿐 아니라, 한국/조선인과 일본인의 국제결혼건수도 75년을 경계로 동족 끼리의 결혼을 상회하여 이미 80% 대가 되었는데, 그 아이들이 일본국적을 선택하는 것은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일본태생' 세대의 한국/조선인은 외국인이지만, '영주권'을 가진 외국인으로 서, 지역주민으로서, 자자손손 살아갈 수밖에 없고, 납세의의무도 지고 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국적조항'을 비롯한 여러가지 사회적 차별이 있다. 세계는 점차 보더레스의 시대로 진행되고 있다. 21세기를 향해 정주외국인으로서의 한국/조선인의 '국적의 벽'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처해 가야할 것인가가 큰 과제이다.


Ⅵ 민족교육
민족교육은 본래, 민족동포의 손에 의해 민족고유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기본으로하면서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승계하는 것을 목표로 진행되는 교육 이다. 재일한국/조선인의 민족교육은 일본의 식민지지배 정책 및 전후의 재일한국/조선인 정책에 의해 변질되었다. 현재 민족교육기관으로서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계와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계가 있다. 조선총련 계는 조선대학교(동경)를 정점으로 전국에 고급학교(고등학교) 12교, 중급 학교(중학교) 52교, 초급학교(초紵閨? 70교, 민단계는 동경, 오사카, 교토에 초,중,고 병설(교토는 중/고)의 4교. 각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의 재외공민, 국민으로서의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근년, 전후 반세기에 이르 는 재일의 현실, 영주권취득 등 정주화의 현실을 근거로 교육에도 힘을 쏟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조선의 해방)에 의해서, 재일조선인의 민족 교육 추진의 기준은 급속히 높아졌다. '한국병합' 이후, 민족교육이 탄압받고 동화정책에 의해서 황국신민화를 강요받아온 조선민족은 해방 후, 민족 교육 의 회복에 노력했다. 전후, 끌려와서 일본에 머물게 된 재일조선인은, 최초의 민족운동으로서 민족학교의 건립에 힘을 모았다. 46년에는 525개의 초급 학교(아동수 4만2182명), 네개의 중학교(학생수 1180명), 12개의 청년 학교(학생수 714명)의 체계적인 민족학교제도가 발족하고, 조선어 교과서를 사용한 교육이 시작되었다. 그 후, 조국의 분단상황을 반영하여 민족 운동을 도모하던 조선인연맹에서 분리해 독자의 활동을 진행한 거류민단은 산하의 민족학교를 창설하였다. 초등학교 52개교(아동수6297명), 중학교 2개교(학 생수242), 훈련소 2개교(289명)가 창설되었다(1984.4 당시).
민족학교 건립운동은 그 후 동서냉전의 격화, 한국전쟁 등의 국제정세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GHQ 및 일본정부는 '조선인학교는 반미, 반일의 사상과 정치교육을 행하여 학교교육법에 위반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1948, 49 년의 2번에 걸쳐 조선인학교 페쇄명령을 강행했다. 이에 항의하는 조선인 민중은 오사카부청, 고베현청을 둘러싸고 싸웠다. 일본정부는 '단체등규 정령'을 적용하여 조선인연맹에 해산명령을 발하고 민족교육을 탄압했다. 이를 계기로 많은 조선인 아동과 학생이 일본학교에 취학하는 상황이 이어 졌다.
조선총련의 결성(1955) 후, 민족학교 재건운동이 진행되었다. 일본정부는 민족 학교의 교육내용, 운영을 문부성의 관리 하에 두는 것을 목적으로 외국인 학교법안을 수차에 걸쳐 국회에 상정했지만, 뿌리깊은 반대운동이 전개되어 성립되지 못하고 폐안되었다. 일한기본조약(한일조약) 성립(1965) 후, 민족 학교는 각종 학교로서도 인가되지 못하고, 재일한국/조선인 아동과 학생의 일본학교에의 취학은 한층 증대되었다. 현재, 재일한국/조선인의 민족 학교 취학률은 약 13%. 일본학교의 취학률이 약 87%을 점하는 현실은, 이 러한 역사적 배경과 경위에 의해서도 일어난 것이다. 민족교육을 둘러싼 상황 속에서, 일본의 교직원 조합을 시작으로 한 운동은 외국인학교법안 반대, 민족학교 권익옹호 저항투쟁의 연대투쟁이 중심이었다.
1960년대에 고양되었던 부락해방교육의 실천에서부터 눈 앞의 피억압자 어린이들의 과제에 눈을 향한 효고와 오사카의 교사들간에 재일한국/조선인 의 인권보장을 목표로 하는 교육실천이 진행되었다. 효고의 湊川高校, 尼崎 工高, 大阪高槻六中, 大阪長橋小의 실천은, 일본학교에서 배우는 재일한국/ 조선인 어린이들의 인권에 초점을 둔 것으로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본 학교에 민족학급, 민족클럽, 지역에서의 민족어린이회의 실천은 전국 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83년에는 부락해방운동과 연대하는 일본인 교사들에 의해 전국 재일조선인교육 연구협의회(전조교)가 결성되고, 재일한국/조선인 의 민족교육권 보장, 민족차별의 근절, 진로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 또한 민족주체의 운동으로서 시민적, 민족적 제 권리의 보장 을 구하는 각 민족단체 등의 활동이 진행되어, 교직원조합, 전조교 등과 연대하여 민족교육, 민족공생교육에 관한 지방교육행정 교육기본방침(지침) 의 책정과 진로보장에 영향을 주고 있다.
70년대 이후, 민족학교의 권익옹호를 구하는 조일주민운동, 국제인권규약 의 비준(1979), 어린이 인권조약의 비준(1994) 등 정세의 변화가 있고, 민족 학교를 지역에 갖는 지방자치단체는 도도부현(都道府縣)에서 시구정촌 (市區 町村)까지 민족학교에 얼마간의 교육보조금을 지급하게 되었고, 이른바 '1 조학교'(학교교육법1조)가 아니라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았던 각종 스포츠 전 국 대회의 문호개방 등도 진행되고 있다. 또한, 일부 공립학교밖에 인정하 지 않는 민족학교 졸업생의 국/공립대학, 전수학교에의 수험자격 문제도 국 공립대학 교원을 중심으로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민족 학교에서는 재일한국/조선인의 일본정주화에 대응하여 교육 내용과 커리큘 럼의 개혁을 진행하고, 교과서를 개정했다. 또 민족학교의 수업공개, 일본 학 교와의 교류 등도 진행하고 있다.


Ⅶ 민족문화활동
전전부터 전후,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재일한국/조선인의 문화활동은 일본 문화의 주류에 대해 항상 방류, 하위(서브컬쳐)로 위치지어 왔다. 그 때문에 뛰어난 학자, 예술가, 대중예능인, 스포츠선수 등이 출신을 감추고 '일본인으로서' 활약하고 있는 예가 적지 않다. 전후의 '국민적 영웅' 역도산 이 조선인이었던 것은 그러한 문화상황을 여실히 증명하는 예일 것이다. 이러한 사정의 배경에는, 동화정책의 결과로서도 드러난 민족적 아이덴티티 의 상실이라는 상황이 있고, 그것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해결되지 않은 역사 적 과제이다. 때문에 자각적인 문화운동은 개인, 단체, 계층, 프로와 아마라 는 차원을 넘어서 그 회복과정과 새로운 창조적 시점을 사정에 넣을 수 밖 에 없다.
한편, 민족문화에 대한 개념, 내용, 규정이 시대와 함께 변화할 수밖에 없 는가, 전통문화의 형식 하나를 취해봐도 북과 남에서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북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름 하에 전통문화의 인위적 개조가 이루어 졌고, 남에서는 식민지 시대부터 무비판적으로 계승된 '관광문화'적 변절이 잔존하고 있다. 재일한국/조선인의 문화활동에 있어서는 이러한 사정도 큰 어려움으로 나타나며, 한층 더한 '독자성'이 의식적으로 요구된다. 결국, 일본 국내에서의 민족차별과 싸우면서 동시에, 자기자신의 민족적 자각과 각성을 요하는 문화의 창출과 그 구체적인 방도, 표현방법이 여러 모양 으로 모색되 어 온 것이다.
따라서 일본 국내에 이미 존재하는 학계, 예능계, 문단, 연극계 등에서 활약하는 개인과 집단의 영위만을 재일한국/조선인 문화의 구체적인 상으로 취할 수는 없다. 메이저씬에서 문화적 영위의 기저에는 무수한 서민, 민중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 존재의 재일성이야말로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덧붙여, 1982년 '하나되어 키우자, 민족문화를, 마음을/이쿠노민족문화제'를 효시로 하여, 각 지역의 독자성 속에서 '민족문화제' '마당'(광장) 등의 모양 으로 확대되고 있는 문화적 영위, 또는 공교육, 학교교육의 실천과 결합한 여러가지 문화활동이 새로운 민족성 창출의 장을 제공하고, 동시에 공생과 국제화를 구현하는 풍부한 가능성과 전망을 낳고 있다. 금후, '북인가 남인가' '조국인가 재일인가' '민족통일인가 반차별인가'라는 이항대립적 패러다임이 과거의 것이 되고, 더욱 적극적이고 다이나믹한 문화적 실험이 행해질 것이 기대된다.


마치며
이상과 같은 인식에 기초하여 재일동포사회를 규정해온 일본사회와 본국의 관계 속에서, 단기적인 과제를 중심으로 최근 삶만들기회(くらしづくり 部會)가 생겼다. 삶만들기회의 멤버는 8명(여성 2명)-학계 2명, 민단 관계자 2명, 사법계 2명, 지역활동 관계자 2명-이다. 2년 간 총 10회에 걸친 회합 에서 의논하였다. 이들은 싸움이 가능한 것보다 가능한한 빨리 구체화될 것 을 소망하는 형편이다.
특히 삶만들기회에서는, 재일동포의 삶의 현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회합이 센다이, 도쿄, 카와사키, 나고야, 교토, 오사카(이즈미, 이쿠노)에서 개최되어, 각지의 민단 현황과 지역활동 등의 싸움을 연구하고 이미 공생 사회의 선취로서의 활동을 체험할 수 있는 점은 좋았다. 그러나 여전히 구체 적인 제언에 이르지 못한 ‘남은 과제’(결혼, 주거, NGO/NPO와의 네트웍 구축, 해외동포와의 네트웍 구축, 뉴커머의 생활 등)도 있다.
여기서 우리도 재일동포의 역사와 현황을 확실히 붙잡고, 선교전략의 가능성을 함께 보았으면 한다. 거기에는 지금까지의 정보와 경험을 살리면서 구체적인 전략을 얘기해 가는 것이 좋겠기에, 먼저 일본에 있는 재일동포와 깊은 관계를 갖는 재일대한기독교회를 보는 것으로 선교전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면, 우선 그 역사에 대해 간단한 개략을 보기로 한다.

박수길 총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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