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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눈으로 보는 일본 기독교사(史)
운영자  2006-06-19 09:38:40, 조회 : 4,202, 추천 : 251

1. 기독교의 전래

일본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1549년 예수회 소속인 프란시스코 자비에르(1506-1552)가 규슈 가고시마에 들어와서 복음을 전파함으로 시작되었다. 그 이후 일본 기독교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비교적 순조롭게 일본에서 복음사역의 기초를 쌓아 나갔다. 1568년 노부나가가 상경하여 그리스도교를 공인함에 따라 황금시대가 도래하였다. 1613년 이에야스(家康)가 금교령을 발표하기 까지 70여년의 기간에 당시 인구 1천5백만 중에서 80만명의 신자가 신앙생활을 할 정도로 크게 부흥하였다.

2. 기독교 금지령

불교와 유교의 영향 등 여러가지 이유로 기독교는 점차 금지되어갔다. 1587년 선교사 추방령을 발표하고 히데요시(秀吉)는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1596년에는 상 필리페호 사건으로 26명의 성인이 나가사키에서 순교하기에 이르렀다. 1613년에는 서양제국 침략의 두려움과 기독교 세력이 강해짐에 따른 지배체제 붕괴의 의식이 커짐에 따라 토쿠가와(徳川) 막부가 기독교 금지를 결의하게 된다. 이것으로 인해 80만명의 신자들에게 수많은 비극이 초래되었으며 1622년에는 55명의 크리스천을 나가사키에서 처형하게 되는 등 20만 내지 30만의 순교자가 생기게 된다. ‘금교령’에 의한 혹독한 탄압은 오히려 신자들을 단결하도록 하여 1637년에는 ‘시마바라(島原)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규슈의 시마바라라고 하는 곳에서 아마쿠사시로(天草四郎)라고 하는 당시 16세의 소년을 우두머리로 농민과 사무라이가 중심이 되어 3만7천명의 신자들이 모여서 1년이상 12만명의 토쿠가와 막부의 군대와 싸워 전원 순교하였다.1639년 기독교의 부흥을 두려워했던 토쿠가와 막부는 드디어 네덜란드를 제외한 모든 나라와 국교를 단절하는 쇄국령을 내리고 300년간 기독교를 박해하게 된다.

3. 기독교 박해

1)종문개역(宗門改役)
1640년 바쿠후는 종문개역을 설치하고 비밀 크리스천들을 단속하였는데 이는 절에 소속한 사람들의 신앙을 조사하여 수록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여행, 혼인, 이사, 취직 등을 할 때 이 증명서가 필요하도록 한 제도이다. 이로서 일본인은 강제로 불교도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2)테라우께 제도
테라우께(寺請)제도는 일본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이 종교에 관계없이 반드시 어딘가의 절에 소속하게 하여 그 소속한 절에서 기독교가 아니라는 증명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3)후미에
후미에(踏絵)란 매년 한 번 마리아나 예수의 그림을 앞에 놓고 밟으면 살려주고, 밟지 않으면 크리스천으로 판단하여 적발해 내는 제도로서 이 제도로 인하여 수많은 크리스천이 순교를 당했으며 기독교가 해금될 때까지 약 300년간 매년 행하여졌다.

4)오인조 제도
농민들을 다섯 가옥이 한 조가 되게 조직하여 세금이나 범죄 등의 감시와 크리스천 적발을 목적으로 만든 것으로 300년간 지속되는 동안 본래 쾌활하고 개방적이고, 단순 소박한 일본인의 성격을 왜곡시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표정에도 나타나지 않는 대단히 알기 힘든 국민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계속되는 일본인의 주된 성격으로 남게 되었다.

5)기리시단 유족조사
토쿠가와 막부는 기독교 금지령에 있어서 만약 기독교인이 적발되면 본인 뿐만 아니라 친족까지 기리시단 계열이라고 하여 남자는 7대까지, 여자는 4대까지를 사람들로부터 격리시켜 특별감시 하에 두었다. 무라하치부(村八分)라고 해서 장례식과 화재 이외에는 다른 어떤 사람들과도 교류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이다.

이와같이 상상하기 힘든 박해로 인하여 일본인의 성격이나 체질이 왜곡 형성됨으로서 기독교가 공인된 지 1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 기독교가 부흥하지 못하는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4. 열린 문

1854년 일·미 화친조약으로 300년 동안의 긴 쇄국이 끝나고 일본에 또다시 기독교가 들어오게 되었을 때 놀랍게도 그 무시무시한 탄압 속에서도 300년 전과 같은 기독교인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140년 전인 1865년 규슈 나가사키, 오오우라(大浦)라고 하는 곳에 프랑스 템플이라고 불리우는 카톨릭 회당인 오우라 성당이 지어졌다. 일본의 감시 속에서 개국 후 처음으로 헌당식이 프랑스영사, 일본거주 외국인, 정박 중인 영국·프랑스·러시아 선원 12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헌당식이 끝나고 2개월이 지난 후 먼발치에서 계속 바라보고 있던 일본인 남녀 10여명이 갑자기 교회당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그리고 검은 가운을 입고 있던 신부에게 갑자기 ‘산타 마리아!’라고 외쳤다. 이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300년 만에 극적으로 크리스천을 발견한 사건이었다. 이들이 우라가미(浦上, 나가사키에 있는 마을 이름) 기리시단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큰 박해로 거의 전원이 순교를 당했다.

그 후 얼마있지 않아 1873년 메이지 정부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일본에 새로운 복음화 시대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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